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문단 편집)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제국]]의 붕괴와 무력한 은퇴 ===== [[1918년]] [[4월]] 이른바 "식스투스 사건"으로 카를 1세의 비밀 평화 계획이 대중에게 알려졌을 때,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동맹은 지금까지 가장 큰 균열을 경험했다. 프랑스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가 충격적인 폭로를 한 후, 합스부르크 황제는 그 소식을 부인했고 [[빌헬름 2세]]는 그의 말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이는것 말고는 방법이 거의 없었다. 카를 1세는 콘라트를 급히 소환하였다. 콘라트는 황제의 부인에 대해 진실성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간접적으로는 그는 황제에게 공감하지는 않았지만, 분리된 평화를 추구하는 동기는 이해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독일과의 협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었지만, 두 제국의 운명은 이제 연결되었고 모든 차이를 넘어서 "함께 진행할 필요성"을 관철했다. 다음 달, 카를 1세가 빌헬름 2세를 만났을 때, 동맹국 간의 구속력 있는 군사 협정과 이탈리아에 대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또 다른 공세를 요구함으로써 카를 1세의 충절을 시험하였다. [[5월 12일]] 카를 1세는 모의 군사 협정에 서명했다. 또한 다소 꺼림칙하기는 하지만 공세를 취하기로 동의했다. 전선에서 충분한 숫자를 보장하기 위해, 그는 [[1900년]]에 태어난 젊은이들의 징병을 승인했다. 콘라트와 나머지 대부분의 장군들은 새로운 공세의 전망을 환영했지만 새로 징병되는 병사들의 대부분은 17세 소년들일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러시아가 전쟁에서 빠지고 [[1918년]] [[3월]]에 시작된 프랑스에 대한 독일의 공세가 분명히 성공함에 따라, 남부에 결정적인 타격을 줄 때가 무르익은 것처럼 보였다. 콘라트는 1916년 알프스 돌출부에서 [[아드리아 해]]로 진출하려다 날씨와 혼란스러운 지휘 체계 때문에 실패한 티롤 공세의 기본 계획을 반복적으로 요구했고, 이번에는 콘라트가 직접 지휘하는 가운데 봄보다는 여름에 발동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카를 1세는 보로예비치의 말도 들었다. 보로예비치는 독일이 협정과 휴전에 동의할 날을 앞두고, 평화 회담에서 협상 카드로 사용하기 위해 군대를 보존할 것을 황제에게 조언했다. 만약 공세가 시작되어야 한다면, 피아베 강을 건너 이탈리아 군의 본대와 마주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콘라트와 보로예비치의 의견이 엇갈리자 카를 1세와 그의 참모들은 가지고 있는 병력들을 그들 양쪽에 나누기로 운명적인 결정을 내렸다. 작전은 첫 단추 부터 잘못끼었다. 콘라트는 25개의 보병 사단을 요청했지만, 3개의 기병 사단과 함께 17개의 보병 사단에 대해 만족해야 했다. 시작부터 병력 확보에 실패한데다 보로예비치 집단군이 가지고 있는 4,300문의 야포중에서 겨우 2,500문의 야포를 할당 받았다. 병력은 AOK가 메츠거의 제1보병사단에게 스위스 국경 근처 티롤 전선의 서쪽 끝에서 예비 공격을 지휘하도록 결정했을 때 더욱 줄어들게 되었다. 메츠거는 토날레 고개를 통해 롬바르디아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 [[6월 15일]] 콘라트 집단군과 보로예비치 집단군은 1차 공격을 시작했다. 그들의 군대는 보급과 물자가 형편없는 상황에 대부분의 부대는 적절한 포병 지원 없이 공세를 시작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군은 첫날 성공을 거두었다. 콘라트 집단군은 비첸차 (Vicenza) 지역에서 [[트렌토|트렌티노]] 고원능선을 따라 양면공격을 시작했다. 반면 보로예비치 집단군은 피아베 강 지역을 따라 총공격을 가했다. 보로예비치 집단군이 피아베 강을 가로질러 돌진하여 15마일 너비의 적 전선에 구멍을 뚫는 처음 몇 시간 동안 콘라트는 알프스 산맥에 자리를 잡았고, 1만 명의 이탈리아 포로를 잡았다. 그러나 콘라트의 진격은 곧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부대를 상대로 좌절되어 콘라트 집단군의 3분의 2가 다시 그들의 초기 위치로 후퇴했다. 한편, 이탈리아의 증원군이 균열을 봉쇄하는 사이 동쪽의 보로예비치 집단군의 침투는 겨우 5마일의 깊이에 도달했다. 이탈리아군은 곧바로 선제포격과 촘촘한 방어선 대응하였다. 결국 보로예비치 집단군은 교두보를 유지하는데 실패했고, 다음 날 보로예비치의 두 번째 싸움에서 완전히 파괴되어 실패했으며, 강둑에 약간의 교두보를 만든 시점에서 오스트리아군은 2만명이라는 대량의 전사자를 내고 있었다. 결국, [[6월 19일]], 아르만도 디아즈는 이탈리아군에게 오스트리아에 대한 반격을 명령해 강둑의 교두보를 탈환, [[6월 23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제국군은 피아베 강을 건너 후퇴했고, 공세의 포기를 선언, 패주를 시작했다. 이렇게 전쟁의 마지막 큰 도박은 또 다른 재앙으로 끝났다. 콘라트와 보로예비치의 군대는 전사자, 부상자, 포로 모두 합쳐 150,000명의 손실을 입었다. 그중 죽거나 사로잡힌 사람들은 70,000명으로 전체 사상자의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 적군은 84,000명 이상의 전사자와 포로를 잃었지만, 공격의 실패로 인해 제국군은 더 이상의 공격적인 행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다행히 이탈리아군은 곧바로 진격하지 않아서 콘라트와 보로예비치는 원래의 방어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막대한 피해를 입은 사실을 고려할 때 이는 대단한 업적이 아니었다. [[6월 25일]], 카를 1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서부전선으로 이동시키는 힌덴부르크의 명령에 동의했다. 여기에는 메츠거의 제1보병사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콘라트의 아들 에르빈은 메츠거 사단의 참모 장교로 복무했고 [[서부전선]]에서 전쟁을 마쳤다. 적의 반격이 탄력을 잃고 전선이 다시 안정되자 카를 1세는 이 재앙의 책임자를 모색했다. 제국 의회는 [[7월 16일]]에 다시 소집될 예정이었고, 실패한 공세에 대한 정부의 강한 비판을 예상했다. 4년전 콘라트가 거두었던 최악의 공세를 비교적 정상으로 보이게 만든 터무니없는 계획을 세운 카를 1세의 AOK가 비난을 받아야 마땅했지만, 카를 1세는 콘라트나 보로예비치 둘 중 한 명이 제국 의회로 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보로예비치를 소환하는 것은 정치인들을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제국을 보존하려는 카를 1세에게는 희망의 열쇠였던 남슬라브 의원들을 불쾌하게 해서 그들의 충성심을 허탈하게 흔들 수 있었다. 슬라브계 장군인 페르디난트 폰 마터러(Ferdinand von Marterer) 장군은 카를 1세에게 콘라트를 해임하라고 조언했다. 이 공세의 실패에 대한 책임은 그에게 없었지만 여론은 희생을 요구했다. [[7월 11일]] 콘라트는 본인을 제국의 수도로 소환하라는 전보를 받았다. 그리고 끝내 그의 해고는 [[1918년]] [[7월 15일]] 월요일에 효력이 발생했다. 해임 당일날 카를 1세는 콘라트를 직접 만나 공식적으로 해임소식을 편지로 건내주며, 카를 1세는 콘라트를 해임 승인하는 것이 본인에게 매우 어려운 결정이었다는 말도 전하였다. 콘라트는 황제에게 "더 이상 공격이 불가능하다"고 관찰하면서 암울한 군사 상황에 대한 평가를 말했다. 카를 1세는 콘라트의 전임 장군참모장이었던 [[프리드리히 폰 벡지코프스키]]가 1906년 사임 이후 곧바로 근위대 대장에 임명되었던것처럼 콘라트에게도 황립 및 왕립 선임 근위 궁사대 명예 대장 직위를 제안했다. 그 명예는 콘라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그것을 거절하려 했으나, 이를 수락하라는 지나의 재촉때문에 마지못해 수락한다. 그러나 추가적으로 온 편지에 카를 1세는 콘라트는 백작으로 승격시켰고, 이 조치에 대해 콘라트는 영광보다는 분노를 느꼈다.[* 훗날 카를 프리드리히 노박(Karl Friedrich Nowak)이라는 언론인과의 인터뷰에서 콘라트는 "계급과 작위에 전혀 가치를 두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한 노박에게 자신이 은퇴를 요청하지 않고 해임되었다는 소식을 퍼뜨리도록 허락해주었다.] [[7월]] 중순에 아내와 함께 [[볼차노|보젠]]을 떠나 [[빈(오스트리아)|빈]]에서 며칠을 보냈다. 그 후 콘라트가 휴가를 내기전까지 예전에 콘라트가 거주했던 필라흐에서 은둔하였다.[* 한편 콘라트는 전선에 나가 있는 동료들의 편지만 받았는데 그중 [[9월]] 초, 서쪽의 [[베르됭]]에서 복무중이던 메츠거는 독일에 대해 그들의 빈약한 무기와 지친 상태를 보고서는 1915년 당시의 "카르파티아의 겨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상기시켰다며 독일 제국의 붕괴를 예언하는 편지를 썼다.] 콘라트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그의 친인척, 가까운 지인들 뿐이었다.[* 그중에는 사별한 아내의 동생 [[https://hr.wikipedia.org/wiki/Aurel_von_Le_Beau|아우렐 폰 레 베아우]](Aurel von Le Beau, 1866-1922) 제55보병사단장도 포함되었다.] 카를 1세가 주최한 무도회에서 모습을 드러낸적 있었는데, 카를 1세는 콘라트에게 마리아 테레지아 대십자 무공훈장, 2급 무공훈장, 제국 의회 상원 종신회원권과 [[원수(계급)|야전원수]] 지휘봉을 수여하였다. 그 후, 필라흐로 돌아온 콘라트는 나라가 망한 마당에 아무 의미 없이 받은 것들에 대해 "코미디"라며 일축했다. 콘라트는 근위대 대장으로서 전쟁의 남은 기간 동안 실질적으로 현역으로 복무했다. 그러나 남티롤 사령부에서 해임되자, 그는 4년동안 휴일없이 복무했던 것[* 1918년 1월 18일, 쿠르트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벗었던 하루를 제외하고]에 자신이 생각한 적절한 보상으로 4개월의 휴가를 요청했다. 카를 1세는 [[11월 15일]]까지 요청을 수락하고 콘라트에게 어떠한 의무도 면제해 주었다. 그 사이에, 그의 오랜 친구인 [[빅토어 단클 폰 크라스니크|단클]]이 황실 근위대의 임시 대장으로 복무했다. [[9월 20일]], 콘라트 부부는 지나의 어머니가 있는 [[트리에스테 자유 지구|트리에스트]]를 방문하였다. 6주동안 콘라트는 [[아드리아 해]]에서 수영을 하거나, 지나와 산책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등 휴가를 보냈다. 이곳에 다시 돌아올수 없을 거라는 직감을 한 콘라트는 아름다운 아드리아 해변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10월 24일]], 이탈리아 전선의 제국군이 끝내 패배하고 무너졌다. 북쪽으로 가는 도로와 철도는 무분별하게 후퇴하는 제국군, 집으로 향하는 탈영병 무리, 그리고 일부 난민들로 혼잡을 빚었다. [[10월 29일]], 콘라트는 트리에스트를 떠나 장모와 작별을 고하고, 아내와 짐을 챙겨 20시간의 기다림 끝에 [[10월 30일]], [[빈(오스트리아)|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11월 4일]], 합스부르크의 통치가 무너진 트리에스트를 이탈리아군이 점령했다.] 그리고 그 날에는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임시 국민 의회는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사회민주당]] 지도자 [[카를 레너]]가 초안 헌법을 채택했다. 2주 동안 제국 정부는 점차 붕괴되어 새로운 공화국에 권력을 이양했다. 한편, 콘라트와 지나는 혼란 속에서도 완전히 은둔하며 살았다. 전쟁의 마지막 몇 주 동안 콘라트의 관심은 이제 그의 살아남은 두 아들들에게 돌아갔다. [[1918년]] [[10월]] 초, 프랑스 [[서부전선]]에서 메츠거 휘하에서 복무 중이던 차남 에르빈과 [[베네치아]]에서 [[이탈리아 전선]]에서 복무 중이던 막내 아들 에곤이었다. 다행히 두 아들들은 제국의 붕괴 이후 무사히 아버지에게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18년 여름까지 유럽의 오래된 질서와 콘라트에게 중요한 거의 모든 것들이 함께 무너졌다. 콘라트의 공격적인 현대적 군사 사상과 전통에 대한 경멸은 그가 권력을 잡을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과한 공격성은 그가 일으켜 세우고자 한 군대와 제국을 파괴하는 전쟁을 촉발시켰다. 그동안 콘라트는 제국이 운명이 점점 끝이 다가오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 전쟁 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다른 주요 인물들의 경우, 궁극적인 붕괴 이전에 죽음을 맞기하기도 하였다. 헝가리가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하기 며칠 전인 [[10월]]의 마지막 날에 헝가리의 총리였던 [[티서 이슈트반]]이 암살을 당했다. 제국의 붕괴를 바랐던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의 창시자이자 콘라트와 동갑이었던 빅토어 아들러는 붕괴를 목격하고 콘라트의 생일날에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날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도 해체되었다. 5개월전 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던 콘라트는 차라리 자신도 죽음을 맞길 바랐지만, 최후의 붕괴를 목격할때까지 콘라트의 신변에는 변함이 없었다. [[11월 12일]] 황제 [[카를 1세]]는 퇴임하였다. 황제는 떠났지만 콘라트는 근위대 대장으로서 임무를 맡기로 되어 있던 11월 중순까지 황제도, 군대도, 제국도 없이 복무해야 했다. 콘라트의 공식적인 은퇴 날짜는 카를 1세가 퇴임한지 3주가 지난 [[1918년]] [[12월 1일]]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